top of page

​김엘리아나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디자인 식민성
- 1950~70년대 국립디자인진흥과 교육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서울대학교 디자인역사문화 전공 박사학위논문 (2020)

 

이 연구는 미국과 유럽 중심적인 디자인사 연구를 벗어나, 1960~70년대 한국과 아르헨티나 정부가 주도한 디자인진흥기관인 한국디자인포장센터(KDPC)와 아르헨티나 산업디자인연구센터(CIDI)의 설립과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디자인 식민성’이라는 개념 아래에 사회역사적 배경, 디자인 개념의 도입과정, 그리고 서구 중심의 디자인 교육 특성을 통해 얻은 양 기관의 특성을 밝히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이 연구는  한국과 아르헨티나가 서로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국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왜 공통적으로 국가가 디자인의 주체로 등장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형태를 지닌 디자인연구센터가 등장 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현재까지 양국은 물리적인 거리로 인해 상호 교류와 연구가 부족했던 것이 현실이다. 드물게나마 이루어진 양국에 대한 비교 연구는 주로 사회, 경제,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었고, 디자인 역사문화적으로 함께 다루어진 연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1960-70년대 각 국립 디자인진흥기관의 현상을 분석하고 이들의 결과를 기존의 디자인 개념의 도입과 교육의 전개와 연관 지어 양국의 국립디자인산업을 비교·분석했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양국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디자인사 연구와 관련 서적, 해외의 연구 사례와 자료 등 2차 자료와 초기에 활동했던 주요 인물들의 증언과 각 기관이 발행했던 인쇄물이나 홍보물, 사진, 신문 기사, 잡지, 정부 문서 등을 주요 근거 자료로 활용했다.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모두 각 대륙의 전략적 요충지로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일본과 스페인의 식민지배는 양국의 문화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국의 경우, 식민지배 하에서 자발적인 문화교류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전통의 말살과 식민지 근대화 속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근대’라는 개념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다. 그 결과 해방 후에도 한동안 미국의 경제협력체(ICA) 원조를 받아 이데올로기적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ICA의 원조를 바탕으로 1957년 공예시범소(HDC)가 설립되어 한국의 수공예 기술과 전통 미술의 산업화가 추진되었고, 시범시청각교육원(DAVC)이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미국식 시각디자인을 한국인의 일상에 널리 보급하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디자인 개념과 가치관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디자인의 정체성이 서구의 소비자에 의해 정의되고 수출과 산업 지향적인 디자인 개념이 한국 사회 전반에 자리 잡았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라플라따(La Plata) 항구도시라는 지리적 조건과 현지인들의 유목민적 특징, 그리고 이른 식민지 교육은 국민으로 하여금 유럽 지향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성격은 아르헨티나의 엘리트들이 주도한 “문명 혹은 야만(Civilización o Barbarie)” 운동 하에서 비교적 빠른 근대화와 지역 문화의 파괴를 일으켰고, 그들의 유럽 지향성을 더 공고히 하는 효과를 낳았다. 독립국이 됐을 때도 혁명은 없었다. 그 결과 지배국의 이데올로기적 잔재가 남아 유독 오랜 기간에 걸쳐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까지도 국가적 정체성, 근대성, 또는 민족성을 주제로 다루는 연구가 크게 발전하지 못한 채 유럽과 서구의 문화적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유사점은 디자인과 정부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것이다. 한국 전쟁 후의 박정희 정권,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페론(Juan D. Perón) 정권은 디자인의 힘을 깨달았다. 1961년 쿠데타로 국가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여 수출 진흥을 통해 자립 경제 구조를 실현하고 경제 성장을 이루고자 했다. 이 맥락에서 1965년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가 개최되고, 1966년에 개관한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이후 한국수출디자인센터)와 한국포장기술협회, 한국수출품포장센터까지 3개의 정부 기관이 통합되어 1970년에 KDPC가 설립되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1946년 페론 정권이 들어서고 ‘포퓰리즘’ 정책을 옹호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도구로써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60년대 프론디시(Arturo Frondizi) 개발주의 정책과 함께 디자인의 이용이 확대되었다. 그 결과, 1950년대 설립된 국립산업기술원(INTI) 산하에 1962년 CIDI가 설립되어 산업디자인 활동과 산업화, 경제성장 등을 촉진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의 KDPC와 아르헨티나의 CIDI는 양국의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국가의 필요 때문에 설립되었다. KDPC의 디자인 정책은 외향적이었던 반면 CIDI의 목적은 자국의 산업 육성을 위한 내수 시장과 디자인의 연결이라는 목적이 더 컸다. 그러나 양 기관의 홍보 활동은 결국 서구에 대한 찬양과 자국 문화에 대한 폄하로 이어져, 현대적 보편주의 모델에 기초한 디자인의 통합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세계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ICSID)의 전 세계적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개념 적용 프로젝트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양국의 기관 모두 ‘굿 디자인’의 교육, 연구, 홍보 등 유사한 디자인 진흥 활동을 추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양국 모두 “산업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이전에 있었던 모든 지역 및 사회문화적 특색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영도의 인식론(zero-point epistemology)’으로 그 용어로 수용하였다. KDPC의 경우, 디자인 교육 세미나의 대부분이 해외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진행되었고, 그 주제는 상품을 장식하는 도구로써의 디자인을 다루거나 ‘한국 전통’이 해외 시장에서 매출을 늘릴 수 있는 장식적 모티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CIDI의 경우, 1950~60년대 ICSID와 울름조형대학(hfg Ulm) 두 기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말도나도(Tomás Maldonado)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런 서구 중심의 디자인 교육은 KDPC와 CIDI의 연구 활동과 공모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자는 실제로 제작된 적도 없고 일상과는 동떨어진 장식적인 제품의 디자인 전시를 열었고, CIDI가 ‘굿 디자인’으로 선정하여 전시한 제품 대부분은 유럽산 또는 미국산 디자인 제품들이었다. 이외에도, KDPC는 연구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해외의 굿 디자인 제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이처럼 양 기관의 디자인 전시회는 모두 자국 디자인의 중요성을 알리기보다는 외국의 디자인이 ‘굿 디자인’이라는 인식만 심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동시에, 이러한 KDPC와 CIDI의 기대치 않은 결과는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국립대학들이 주도해온 디자인에 대한 현대적 개념, 그리고 교육과정의 도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국 모두에서 통용되었던 현대 디자인의 용어는 서구로부터 수입된 개념이었다. 한국에서의 디자인은 일제강점기부터 양식화된 장식의 밑그림을 의미하는 ‘도안(圖案)’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58년 공예시범소와 시범시청각교육원을 통해 외화벌이를 위한 응용 미술로 도구화 되기 시작했다. 한편 ICA는 교환학생들이 미국의 디자인 교육을 체험하고 귀국하여 그 경험을 자국에 공유할 수 있도록 유학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의 ‘장식으로의 디자인’과 미국의 ‘자본주의 상품으로서 디자인’의 대립과 공존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생들이 서울대학교 교수진이 되면서 일본과 미국에서 배운 것을 비판 없이 자국에 이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와 대한민국상공미술전시회에도 주요 인물로 참여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유럽의 구체 예술과 깊은 관련이 있는 막스 빌이 1950년대 울름조형대학(hfg Ulm)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말도나도를 초청했고,  말도나도의 활동으로 인해 아르헨티나에 현대 디자인이 소개되었다. 말도나도는 유럽과 아르헨티나의 중개자가 되었고, ‘과학으로서의 디자인’은 아르헨티나가 발전주의 시기를 벗어나고 유럽과 동등한 위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의 생각을 강조했다. 특히 말도나도는 195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 건축대학(FAU)에 디자인 전공이 없고, CIDI가 수도의 디자인 교육을 대신했을 때 주요 역할을 맡았다. CIDI에서 일하기도 했던 FAU의 교수진들은 1946년부터 새로운 시도를 더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방 대학에 바우하우스와 울름조형대학의 교육과정을 먼저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럽식 유니버설 디자인 교육과정의 도입에 대한 여러 시행착오 끝에, 1985년이 되어서야 산업디자인 전공이 부에노스아이레슨 건축, 도시계획대학, FAU에 도입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건축디자인도시계획대학, FADU가 되었다.
           이처럼 사회문화적 측면에서의 지속적인 비판과 자각 없이 외국의 교육과정을 추종하고 받아들였던 역사적 맥락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은 KDPC와 CIDI는 이 연구에서 ‘디자인 식민성’이라는 결과를 낳는 데 있어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연구자는 이 연구를 통해 무비판적으로 수입된 디자인 개념과 교육과정이 학문적인 측면을 넘어 오늘날 양국 국민들의 디자인 인식과 일상 등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한국의 경우, 198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1990년대 말 이후 디자인 식민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판적 디자인 이론의 정립과 자기 성찰로 독자적인 디자인을 향한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었다.

 

주요어 : 디자인 교육, 디자인진흥, 세계산업디자인단체협의회 (ICSID), 한국디자인포장센터(KDPC), 아르헨티나 산업디자인연구센터(CIDI), 국립대학교, 발전주의, 해체식민주의. 

(1) 1954년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 응용미술과 실기실에서 작업중인 학생들. 서울대학교미술관 소장.  
 

(2) 1963년 디아고날 노르떼(Diagonal Norte) 길을 둘러싼 CIDI 국제산업디자인전시 홍보물.

 

(3) 1974년 KDPC 상설전시장 내부 모습.

 

 

 

 

 

 

 

 

 

 

 

Eliana KIM

 

The Design Coloniality of South Korea and Argentina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Governmental Design Promotion and Education during the 1950~70s

 

This study examines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two governmental bodies, the Korea Design Packaging Center (KDPC) and the Argentina’s Industrial Design Research Centre (CIDI) as design promotion agencies and evaluate the outcome of these governmental organizations’ foundation in the 1960s and 1970s. Despite the vast research published on the American and European design history in the 1960s and 1970s, little is known about the Korean and Argentinian design during this time. Using a comparative analysis, this research aims to interpret the results generated by above institutions as products of their socio-historical backgrounds, the introduction of foreign design concepts, and the commitment to Western-centric design education under the name of ‘Design Coloniality’.
          The study begins with why, despite of being located on the opposite sides of globe, Design in Korea and Argentina was authorized and promoted by each government, and why alike Design Centers appeared in a similar period of time.    There has been a lack of research collaboration between South Korea and Argentina, given the physical distance between these two countries. Comparative studies, which are sparse, primarily focused on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perspectives. To date, there has been no study published to cross-examine these countries on the grounds of design history and culture. In order to address this scarcity, this study provides valuable insight into the phenomenon of both National Design Promotion Agencies during the 1960~70s. It compares and analyzes their results in relation to the introduction of the concept of ‘modern design’ and its educational development. Comparative analysis was carried out using primary sources, such as governmental documents, photographs, as well as testimonies by scholars who participated in the planning and delivery of design centers, national universities, printed materials, newspapers and magazine articles. Secondary sources including bibliography and case studies were also used, in supplement to the primary sources. 
          Despite inherent differences between Korea and Argentina, both countries served as strategic geographic locations which undoubtfully led to a strong interest for subjugation by occupying countries. Japanese and Spanish colonial rules, respectively, had a strong influence on the cultural and economic development. In particular, Korea lacked an opportunity to progressively transit into a modern era as Joseon was forced to abolish its tradition and subdue into ‘Colonial Modernity’. Cultural coloniality continued after its liberation, as it fell under the economic support of the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ICA). By founding Handicraft Demonstration Center (HDC) and Demonstration Audio Visual Center (DAVC), ICA promoted industrialization of Korean traditional arts and crafts and largely contributed to the wide spreading concept of American design and its value. Both institutions capitalized on the export-oriented design which utilized ‘Korean identity’ and ‘tradition’ as mere decorations to help attract foreigners’ attention to boost capital inflow.
          Argentina, on the other hand, developed a strong preference for Europe over their neighboring Latin American countries due to the accessibility of port of La Plata, early colonial education as well as the nomadic nature of locals. Expedited rapid modernization – and the regional culture obliteration – was achieved under the “Civilization or Barbarism (Civilización o Barbarie)” campaign led by the Argentinian Elite whose admiration for Europe prevailed throughout the following years. Argentina did not experience any revolution following its independence, as such ideological remnants of the dominant nation remained to influence its national identity, modernity and ethnicity of the society, shadowed by Europe and West modernization.
          Another important similarity lies in the relationship between design and its political use by each government. Both Park Jung-hee in post-war Korea, and Peron in Argentina were quick to recognize the power of design. Coup d’etat in 1961 saw Park Jung-hee rising to power, and he launched the Five-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seeking to achieve a self-sufficient economic structure and economic growth through export. A significant level of funding was injected into culture and art, exemplified by hosting of the Korean Commercial and Industrial Art Exhibition in 1965, and founding of the Korean Craft Design Institute in 1966 (which later became the Korea Export Design Center in 1969). The year of 1970 marks the foundation of KDPC through merging of three national organizations: the Korean Craft Design Institute (later called Korea Export Design Center), the Korea Packaging Technology Association, and the Korea Export Packaging Center. 
          In Argentina, design gained its popularity following the Peron regime in 1946. Its wide spread use in government propaganda in advocacy of ‘populism’ politics saw the expansion of influence with the developmental government of Frondizi in the 1960s. To promote industrial design activity, industrialization and economic growth, CIDI was established in 1962 under the National Institute of Industrial Technology (INTI).
          It is evident both KDPC and CIDI were created based on the socio-economical needs. KDPC’s design policy was clearly outward-oriented. On the contrary, the purpose of CIDI was to foster local industry within its domestic market. Both institutions, inadvertently, resulted in the consolidation of design based on a modern universalist model, leading to the overvaluation of the western form and the devaluation of the regional culture.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Societies of Industrial Design (ICSID)’s global industrial design concept implementation project was partially responsible. It was not co-incidental that both centers engaged in similar activities such as education, investigation, and promotion of ‘good design’.  Without consideration to the prior regional and socio-cultural background, both countries accepted industrial design on a ground-zero epistemology. At KDPC, design education seminars were dominated by international scholars, some of whom used design as a tool to embellish a product by adding traditional decorative motifs to increase sales in foreign market. Others imposed the definition of industrial design as a unique universal concept.
          This Western-centric education inevitably influenced the researches and competitions held at KDPC and CIDI. The former filled its design exhibition with decorative products which were impractical and unable to be manufactured on a bigger scale. The latter awarded products exhibiting ‘good design’ of European or American origin. Most importantly, both organizations failed to promote the importance of national design, and saw foreign design as a synonym for ‘good design’. 
          Modern design was an imported concept in both countri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design was known as ‘Do-an (‘도안 圖案)’ which means stylized decoration sketch in Japan. In 1958, it became known as applied arts through HDC and DAVC and served to increase foreign capital. ICA also supported exchange students to study US design and many of these scholars returned home to later become professors at national universities. The Japanese idea of design as decoration versus the American capitalist perspective was debat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but without much critical thinking. These academics were involved in the Korean Craft Design Institute and the Korean Commercial and Industrial Art Exhibition. 
          In Argentina, modern design was introduced by Maldonado in 1950s. He was invited to teach at hfg Ulm by Max Bill who was heavily influenced by European concrete art. Maldonado worked as a mediator between Argentina and Europe and introduced the idea of ‘design as science’ thinking that it holds the key for Argentinian economic growth during the developmentalist period. He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at CIDI whilst it served as Buenos Aires’ only design school and the European design education model was being applied in diverse regional Design Schools. All these trials derived into FADU in 1985, when the Buenos Aires Faculty of Architecture and Urbanism (FAU) incorporated the Department of Industrial Design and became FADU.
          The researcher believes that the government supported KDPC and CIDI allowed for ‘Design Coloniality’ by being oblivious to the socio-cultural aspects of each society and unconditionally accepting the foreign curriculum. The imported concept and design education did not only influence the perception of design in the general public but it also influenced people’s daily life in both countries. Design coloniality finally experienced a moment of epiphany following the South Korean economic boom of the 1980s, as critical design theory began to emerge and allowed Korean Design scholars to review their history in the manner of self-reflection toward independence in the late 1990s.
          As part of this ultimate movement, this study aims to reinforce the recent movement of Korean design historians as they seek to critically evaluate Korean design theory and its history and also to bring some positive enthusiasm to the design academy and industry.

Keywords: Design Education, Design promotion, International Council of Societies of Industrial Design (ICSID), Korea Design Packaging Center (KDPC), Argentina Industrial Design Research Center (CIDI), National University, Developmentalist, Decolonial. 

bottom of page